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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떠난 지 보름… ‘20년만’ 김민종이 남자들 울린 이유

서정민 기자
2026-01-17 23: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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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떠난 지 보름… ‘20년만’ 김민종이 남자들 울린 이유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영화 ‘피렌체’의 예고편에 나오는 이 질문이 유독 무겁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지난해와 올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어른’이었던 연예계 거목들이 차례로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5일 안성기(향년 74세), 지난해 11월 25일 이순재(향년 91세), 9월 25일 전유성(향년 76세). 한 시대를 이끌었던 영웅들의 빈자리가 낯설고,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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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그만두실 때가 된 것 같다”는 조언과 “피렌체로 오라”는 제안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중년 남성의 여정이, 그가 던지는 ‘행복’이라는 질문이 유독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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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개봉한 ‘피렌체’는 아내를 잃고 권고사직까지 당한 중년 남성 석인(김민종 분)의 이야기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가 젊은 시절 자신의 열정이 살아 숨 쉬던 피렌체를 다시 찾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로드무비다. 개봉 4일 만에 1만 관객을 넘겼지만 손익분기점 20만 명까지는 아직 멀다. 하지만 숫자로 잴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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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은 피렌체에서 찬란했던 청춘의 흔적과 마주한다. 예고편 속 “왜 이제 오셨느냐”며 반기는 목소리, “콜로세움은 갔다 왔느냐”는 일상적인 대화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 석인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을 돌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창열 감독은 전작 ‘그대 어이가리’로 전 세계 독립영화제에서 56개의 트로피를 받은 실력파다. ‘피렌체’도 국내 개봉 전인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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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주연으로 돌아온 김민종을 보는 건 묘한 경험이다. 마지막 주연작이 ‘종려나무 숲’(2005)이니까 정말 오래됐다. 그런데 이번 ‘피렌체’에서 그가 보여주는 연기는 세월이 숙성시킨 깊은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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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지쳐 보이는 중년의 얼굴이 오히려 청춘을 그리워하는 석인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영화 속 석인이 지나간 시간을 되짚듯, 우리도 김민종의 옛 시간을 떠올리며 우리의 청춘을 곱씹게 된다.

예지원은 이번에도 디테일 하나하나 놓치지 않는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다. 석인의 옛 친구 엔조의 아내 유정 역을 맡았는데, 로렌조 데 메디치의 시를 읊기 위해 이탈리어를 배우고, 남편의 영혼을 보내는 살풀이춤을 위해 서정숙 선생께 전통 살풀이를 배웠다고 한다.

그가 추는 살풀이 춤사위는 정말 아름답다. 조금 딱딱하게, 살짝 톡 쏘는 말투는 마치 두오모 성당의 ‘종소리’ 같다. 따뜻하면서도 로맨스 무드는 아닌, 인생의 맛을 아는 어른의 느낌. 1부터 100까지 다 채웠는데 과하지 않으니 진짜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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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신인도 있다. 김민종의 청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마스크의 유정하. ‘젊은 석인’으로 주인공다운 에너지를 보여주는데, 안정감 있는 연기에 청명한 미소, 딕션까지 좋다. 영국 국적이지만 한국말이 유창한 해리 벤자민(엔조 역)도 눈에 띈다. 음색과 눈빛이 좋고, 김민종·예지원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촬영감독 이성제(‘추격자’ ‘황해’ ‘공조’ ‘범죄도시4’)가 담아낸 피렌체가 참 아름답다. 산타크로체 광장, 베키오 다리, 두오모 성당. 상업 영화로는 최초로 두오모 내부 촬영에 성공했다고 한다.

한편, 안성기의 장례식에는 정우성이 영정을, 이정재가 금관문화훈장을 들었다. 설경구, 박철민, 유지태, 박해일, 조우진, 주지훈 등이 운구를 맡았다. 3일간 이어진 이순재의 장례식에는 유재석, 조세호, 장동건, 이승기 등 후배들이 찾았다. 전유성의 노제에는 100여 명의 후배 코미디언들이 마지막 길을 지켰다.

눈물과 미담이 쏟아졌다. 바다는 안성기가 결혼 축하하며 국수를 말아주고 시 같은 덕담을 건넸다고 했다. 김하영은 이순재가 “너희는 그냥 연기를 하는 거야”라며 위로해줬다고 했다. 김신영은 전유성을 “우리네 인생에서 등불 같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안성기는 70여 년 연기 생활 중 사소한 구설 하나 없이 봉사활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펼쳤다. 이순재는 90세에도 “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모자란 부분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전유성은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통용시키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들은 모두 한평생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후배들에게 따뜻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금, 영화 ‘피렌체’ 속 석인처럼 우리도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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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피렌체’는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한 남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라 긴장감도 별로 없다. 그런데 바쁜 일상 속 여유처럼, 한 템포 쉬어가며 생각할 시간을 준다.

청춘은 이제 없지만, 공허한 마음으로 피렌체를 찾았던 석인이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영화를 나가듯, 중년이 돼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 보이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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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떠난 지 보름… ‘20년만’ 김민종이 남자들 울린 이유 (사진=영화 '피렌체')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석인과 함께 피렌체를 걸으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고,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다는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안성기가 2023년 4·19 민주평화상 수상식에서 “남아 있는 제 삶에서 우리 사회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 신명을 바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큰 별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등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결국 이 영화가 건네는 건 다시 살아갈 용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주 의식하게 되는 중년 남성들에게 진한 울림을 남긴다.

영화 ‘피렌체’는 현재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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