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과 호수, 그리고 바다. 자연이 주는 모든 선물을 품은 도시, 속초이다. 매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 북적이는 유명 명소들의 화려함 뒤편에는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보석 같은 삶의 풍경들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설악의 비경을 찰나의 앵글에 담아내고, 거친 바다가 내어주는 맛을 일구며, 이곳에서 인생의 2막을 함께 써 내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겨울의 끝자락, 다가오는 봄과 함께 KBS 1TV '동네 한 바퀴' 359회는 속초 특집 2부작 중 그 두 번째 여정으로, 그동안 우리가 몰라봤던 속초의 숨은 명소를 찾아 떠난다.

속초를 한눈에 담다, 설악산 권금성
설악산 권금성은 해발 700m 정상부에 위치한 천연의 암벽 요새로, 주봉인 대청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화채능선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설악산을 넘나드는 길목을 지키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설악산성(雪嶽山城)'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조선 시대 이후 지형이 너무 험준해 차츰 퇴락하며 성벽의 흔적만이 남게 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케이블카를 통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속초의 대표적 명소가 됐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바위산을 10여 분가량 오르면 닿게 되는 권금성 정상은 속초의 산과 바다를 가장 넓은 시야로 둘러볼 수 있다.

오징어 순대, 속초의 어제와 오늘을 품은 ‘속초관광수산시장’
설악의 정취를 뒤로하고 도심으로 발길을 옮기면, 속초의 역사를 담은 속초관광수산시장이 반긴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이곳은 오랜 세월 속초 시민의 삶을 지탱해 온 터전이자, 이제는 전국의 여행객이 모여드는 대한민국 대표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시장의 골목마다 스며든 진한 향기는 속초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실향민들의 애환이 담긴 음식에서 이제는 누구나 찾는 별미가 된 오징어순대,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길게 줄을 서게 만드는 술빵은 소박하지만, 넉넉한 시장의 인심을 담고 있다.

속초의 별미, 속풀이 문어국밥 식당
속초에서 탄생한 특별한 맛이 있다. 푹 고아 낸 한우 양지와 사골 육수에 싱싱한 문어를 곁들인 '문어국밥'이 그 주인공이다. 이 생경하면서도 깊은 맛을 일궈온 오정은(64) 씨는 올해로 장사 23년 차, 이 자리를 지킨 지는 14년이 된 속초의 베테랑이다. 서울 왕십리 토박이였던 정은 씨는 80년대 광고 회사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IMF 이후 남편의 건강을 위해 연고 없는 속초로 내려와 식당을 차렸다.

제사상에 꼭 문어를 올리는 속초의 풍습은 국밥을 좋아하던 정은 씨 부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한우의 담백함과 문어의 시원함이 만난 국밥은 그렇게 탄생했다. 처음엔 하루 한 그릇도 팔지 못할 만큼 고전했으나, 이제 문어국밥은 속초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가게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골목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문어국밥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본다.

설악으로 가는 첫걸음, ‘설악향기로’
권금성에서 설악의 넓고 높은 웅장함을 확인했다면, 이제는 설악의 숨결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순환형 산책로 ‘설악향기로’가 발길을 이끈다. 설악향기로는 설악산의 비경을 보다 다채로운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총길이 2.7km의 특색 있는 힐링 코스다.

누구나 가벼운 걸음으로 자연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설악향기로는 속초의 자연과 사람, 그리고 새로운 계절의 이야기를 잇는 가장 아름다운 산책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설악의 숨은 비경을 앵글에 담다 – 강레아 사진작가
사진작가 강레아(58) 씨에게 설악산은 단순한 촬영지가 아닌, 30여 년간 수없이 오르내리며 깊은 대화를 나눠온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녀의 렌즈는 일반적인 등산로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설악의 은밀한 표정을 포착한다. 나무보다 높은 암벽의 끝, 지도에도 없는 험로를 암벽등반 기술로 직접 오르내리며 얻어낸 귀한 장면들이다. 그녀가 포착한 설악은 매 순간 기분과 표정을 바꾸는 역동적인 존재다.

준비되지 않은 자는 밀어내고, 때로는 예고 없이 눈부신 속살을 허락하는 산의 변덕을 견디기 위해 그녀는 4년 전 아예 속초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설악을 ‘찍으러 가는 대상’이 아닌 ‘매일 마주하는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산이 허락하는 찰나를 기다려 담아낸 레아 씨의 사진은 우리에게 익숙한 설악의 이면을 보여준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서 포착한 그녀의 작품들은, 속초라는 도시가 품은 가장 깊고 장엄한 야성을 담고 있다.

봄을 준비하다 - 설악산자생식물원
설악의 끝자락에 자리한 설악산자생식물원은 설악의 고유 식물들을 한곳에서 살필 수 있는 ‘설악 생태계의 축소판’이다. 이곳에는 설악산에 자생하는 멸종위기 희귀식물부터 친숙한 야생화까지 총 122종 5만여 본의 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특히 인위적인 조성을 최소화하고 주변 지형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자연 생태에 가장 가까운 환경을 구현해 낸 것이 이곳만의 특징이다.

겨울과 봄 사이, 식물원은 겉보기에 고요한 휴식기에 든 듯하나 그 내면은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봄 준비로 분주하다. 지난 겨울 꽁꽁 언 땅속에 심어 둔 꽃씨가 무사히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살피는 식물원 사람들의 손길은, 이미 설악에 당도한 봄의 온기를 전한다.

이 선장 남매의 속초 바다 한 그릇
속초 청초호 인근 교동 먹거리단지는 1990년대 초부터 형성된 속초 대표 먹거리촌이다. 화려한 관광지 식당보다 현지인들의 끼니를 책임지며 성장해 온 이 골목 한편에는, 바다의 시간표에 맞춰 문을 열고 닫는 특별한 식당이 있다. 이곳을 운영하는 이창복(61) 선장과 누나 이수옥(64) 씨는 30년 넘게 바다와 함께해온 속초의 산증인이다. 청호동 아바이마을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 선장은 과거 배 위에서 선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화장(火匠)’ 출신이다.

갓 잡은 생선을 투박하게 썰어 고추장에 비벼 먹던 뱃사람들의 방식은, 오늘날 이 집의 대표 메뉴인 물회의 뿌리가 되었다. 이 집의 물회는 그날그날 바다가 내어주는 생선에 따라 구성이 달라진다. 새벽 4시, 이 선장이 직접 배를 몰고 나가 잡아 온 제철 수산물을 누나 이수옥 씨가 즉시 손질해 상에 올린다. 하루 조업량만큼만 판매하기에 단 몇 시간만 짧은 장사지만, 남매의 식탁에는 속초 바다의 거친 파도와 실향민 가족의 끈끈한 서사가 가득하다. 변해가는 먹거리단지 안에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키는 남매의 모습은, 거친 바다에 기대어 다섯 남매를 억척스레 키워내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닮아 더 깊은 울림을 전한다.

‘설악로데오거리’ 속 숨은 속초의 맛, 홍게샌드위치
속초의 중심부, 설악로데오거리는 한때 영동 북부권 최대의 쇼핑 1번지로 명성을 떨쳤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2000년대 이후 상권 침체라는 부침을 겪으며 도심 재생 사업을 통해 새로운 변모를 꾀해온 이곳은, 여전히 외지인과 원주민의 삶이 가장 솔직하게 교차하는 속초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이 거리 한편에는 속초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른 '홍게 샌드위치'가 있다. 4년 전 속초의 따스한 품에 반해 정착한 황종식(67)·조광숙(58)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유명 호텔 음료 파트 출신의 남편과 30여 년 경력의 외식업 베테랑인 아내는 우연히 여행차 들렀던 이곳에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들의 대표 메뉴인 홍게 샌드위치를 완성한 것은 ‘동네 사람들’이었다. 비릴 것이라는 선입견에 망설이던 부부에게 지역 특산물인 홍게 활용을 권유하고, 완성된 맛을 입소문으로 퍼뜨려준 이들이 바로 로데오거리의 이웃들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이를 텃세 없이 받아들이고 응원해 준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이 작은 가게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이제 이곳은 아침 일찍 설악산과 바다로 향하는 여행객들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조식을 위해 찾는 글로벌 사랑방이 되었다. 홍게 샌드위치 한 조각에는 도시가 낯선 이들을 품어내는 방식과 로데오거리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속초 여정의 끝자락, 해가 지는 영랑호에서
신라 화랑 영랑이 그 수려한 경관에 반해 머물렀다는 전설을 품은 '영랑호'는 둘레 7.8km에 달하는 거대한 자연 석호다. 속초 8경 중 하나인 '범바위'는 마치 범이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속초 여정의 끝,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길었던 속초 한 바퀴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산과 바다, 호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익숙한 풍경의 뒷면에서 원석 같은 진심을 발견하는 동네,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편 '동네 한 바퀴' 방송 시간은 2월 28일 토요일 저녁 7시 10분이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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