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㉞] 한글날 100돌, 밤티·느좋 앞에서 잠시 멀뚱해진 우리에게 -〈21세기 언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김연수 기자
2026-10-09 1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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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21세기 언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40 x 40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주, 2017.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텅 빈 화폭 한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다. 가르마 위에는 알록달록한 머리 장식인 첩지를 얹었고, 금빛 점이 반짝이는 짙은 남색 저고리에 금박 무늬가 찍힌 검은 옷고름을 길게 늘어뜨렸다. 반투명한 먹빛 치마 아래로는 코끝이 붉은 남색 꽃신이 보인다. 차림새는 잔칫날처럼 곱지만 몸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어깨는 앞으로 처졌고 두 팔은 힘없이 축 늘어졌으며, 푸른 매니큐어를 바른 손끝은 갈 곳을 잃은 듯 허벅지 앞에 멈춰 있다. 눈길을 바닥으로 떨군 굳은 얼굴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얼어붙은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은 〈21세기 언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줄여서 '갑분싸'다. 2019년 이 그림 속 상황에 대해 필자는 ‘옆에 있던 친구가 분위기 싸해질 말을 했나 보다’고 적었다. 화폭에는 그 친구도, 문제의 한마디도 없다. 말이 떨어진 직후의 서늘한 공기만 남았다. 〈내숭〉 시리즈의 인물들이 늘 그렇듯, 반쯤 비치는 치마 너머로 뻣뻣한 두 다리가 그대로 보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어도 당황한 속내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이 그림이 속한 〈21세기 언어〉는 우리가 온라인에서 자주 드러내는 감정을 26가지로 나눠 하나씩 그림으로 옮긴 2017년 연작이다. 무덤덤한 표정과 위트 있는 주변 상황에 무게를 둔 기존 〈내숭〉 시리즈와 달리, 이 연작은 순간순간의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과 누구나 공감할 만한 몸짓에 집중했다. 이모티콘을 돈 주고 사서 기분을 전하는 시대의 모습도 함께 담았다. 당시 이모티콘 시장이 3000억 원대로 커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짝을 이루는 작품인 〈21세기 언어: ㅋㅋ〉와 〈21세기 언어: ㅎㅎ〉를 이 그림 곁에 놓아 보면 온도 차가 더 뚜렷해진다. 〈ㅋㅋ〉 속 인물은 구김이 살아 있는 한지를 오려 붙인 노란 저고리 차림으로, 주황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다른 손 검지로 그림 밖을 가리킨다. 웃음이 터진 까닭이 보는 사람 쪽에 있다는 듯하다. 너무 웃겨도 입만큼은 가리는 내숭이다. 〈ㅎㅎ〉 속 인물은 두 눈을 감고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는다. 두 그림 모두 머리 양옆에 엇갈려 그은 먹선이 웃음에 들썩이는 몸짓을 대신한다. 〈갑분싸〉에는 그 먹선이 없다. 웃음이 멈춘 자리에서는 움직임도 함께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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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21세기 언어: ㅋㅋ> 40 x 40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주, 2017.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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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21세기 언어: ㅎㅎ>(오른쪽), 40 x 40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주, 2017.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필자가 올해 홈페이지에 이 그림을 다시 올리며 덧붙인 메모는 짧았다. '갑분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 작업하던 무렵 한창 유행하던 말이, 9년이 흐르는 사이 그린 사람조차 새삼스러워하는 낱말이 된 것이다. 분위기가 식는 순간을 가리키던 유행어가 이제는 스스로 식어 버렸으니 얄궂은 반전이다. 지금 이 말을 꺼냈다가는 오히려 분위기가 머쓱해질지도 모른다.

세월을 타는 것은 유행어만이 아니다. 같은 글자를 받아들이는 온도도 때와 자리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가 〈ㅎㅎ〉에 담고 싶었던 것은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ㅎㅎ'를 다정한 웃음으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거리를 두거나 예의상 붙인 표시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림 속 표정은 그대로인데, 제목의 두 글자를 읽는 눈은 사람마다 다르다. 〈갑분싸〉의 치마 너머로 다리가 비치듯, 짧은 'ㅎㅎ' 뒤에도 미처 다 적지 못한 속내가 비친다. 반가움일 수도, 머쓱함일 수도, 조심스러움일 수도 있다.

아시아경제가 한글날 100돌을 맞아 소개한 신조어 가운데에는 '밤티', '늙크크', '느좋'과 함께 뜻밖에 '갑분싸'도 들어 있었다. 밤티는 못생겼거나 별로라는 뜻이고, 늙크크는 최신 유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느좋은 '느낌 좋음'을 가리킨다. 어떤 이에게는 이미 낡은 말이 다른 이에게는 아직 새 말인 셈이다. 같은 기사에서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게임, 아이돌 문화처럼 한정된 무리 안에서 만든 표현이 빠르게 퍼지면서, 배경을 모르면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 많아졌다고 짚었다.

피앰아이(PMI)가 전국 만 20~59세 1000명에게 물은 조사에서 신조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응답은 20대 34.0%, 30대 21.3%, 40대 11.1%, 50대 7.5%로 나이가 많을수록 낮았다. 같은 자리에서도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갑분싸가 된다. 젊은 층이 꺼낸 새 말에 윗세대가 멀뚱해지기도 하고, 윗세대가 즐겨 쓰는 농담이나 한자어 앞에서 젊은 층이 어색하게 웃기만 하기도 한다. 어느 한쪽의 잘못은 아니다. 같은 마음을 서로 다른 말에 담아 건넬 뿐이다.

같은 조사에서 올해 한글날이 100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응답도 51.4%였다. 날마다 쓰는 말과 글이라 오히려 그 기념일이 몇 돌인지는 무심히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한글날은 1926년 조선어연구회, 지금의 한글학회가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념하며 시작됐다. 앞의 아시아경제 기사는 한글은 문자이고 한국어는 언어라며, 신조어를 '한글 파괴'가 아닌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았다. 글자는 그대로이고, 그 글자로 짓는 말이 쉬지 않고 태어나고 또 저물 뿐이다. 'ㅋㅋ'와 'ㅎㅎ'도 자음 하나를 겹쳐 적어 웃음소리를 옮긴, 한글다운 표현이다.

낯선 말 때문에 분위기가 잠깐 싸해지는 것은 그 말을 몰라서이지 서로를 밀어내서가 아니다. 세 그림 속 표정은 한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얼굴이다.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는 〈ㅋㅋ〉처럼 입을 가리고 깔깔대다가도, 다른 자리에서는 〈갑분싸〉처럼 말을 잃고 굳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는 짧은 물음과 대답을 한 번 주고받는 사이, 한 무리의 말은 비로소 모두의 말이 된다. 모르는 말 앞에서도 서로의 뜻을 끝까지 알아들으려는 다정함이 있다면, 어깨를 늘어뜨린 〈갑분싸〉 속 인물 곁에도 언젠가 웃음에 들썩이는 먹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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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㉞] 한글날 100돌, 밤티·느좋 앞에서 잠시 멀뚱해진 우리에게 -〈21세기 언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짐〉(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과·동양화과 학사와 동양화과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현정 작가는 현대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21세기 풍속도 〈내숭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다수의 개인전과 전시 작품 완판, 6만 7402명의 국내 개인전 최다 관람객 기록 등으로 주목받았다. 김현정 화가의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31종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MBC 연기대상에서는 연말 방송 시상식 최초로 한국화를 무대 배경으로 선보이며 메인 작품과 로고, 포스터, 티켓, 브릿지 영상을 맡았다. MBC 일일드라마 〈가족관계증명서〉에서 동양화가인 주인공 '지니'의 그림 역시 김현정의 〈내숭〉 연작이다. 프랑스 카스텔 그룹의 스파클링 와인 뵈브 드 베르네(Veuve du Vernay) 코리아 에디션에는 서울의 풍경을 그려 넣는 등 방송과 브랜드를 넘나드는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림에세이 《김현정의 내숭》, 컬러링북 《내숭이야기 컬러링북》, 《한국화를 배우는 시간: 개념편》, 《한국화를 그리는 시간: 실기편》 등이 있다. 또한 김현정 작가는 미술강연과 강의를 이어가는 교수로서 전통 회화와 동시대 시각문화를 연결하고 있으며,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전시·교육·집필·칼럼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글 _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