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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겸, 17년 무명 딛고 400번째 메달

서정민 기자
2026-02-09 20: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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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겸, 17년 무명 딛고 400번째 메달 (사진=연합뉴스)
37세의 스노보드 ‘맏형’ 김상겸(하이원)이 17년간의 긴 무명을 딛고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다.

김상겸은 8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결승에서 베냐민 카를(오스트리아)에게 0.19초 차로 준우승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예선을 32명 중 8위로 통과한 김상겸을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2018년 평창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상호(31·넥센윈가드)가 16강에서 일찍 탈락하며 한국의 메달 도전은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홀로 남은 김상겸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8강에서 세계랭킹 1위 롤란드 피슈날러(이탈리아)를 만났지만 기죽지 않았다. 초반 무리하게 치고 나가기보단 상대를 따라가며 기회를 엿보던 김상겸은 중반 경사가 낮아질 때 가속을 붙였다. 평탄한 구간에서도 속도가 떨어지지 않자 당황한 피슈날러가 황급히 뒤쫓다 코스를 이탈했다.

이 ‘역전 전략’의 비밀은 보드에 있었다. 김상겸은 이번 시즌 195cm짜리 보드로 교체했다. 자신의 키(182cm)보다 13cm나 긴 보드다. 회전이 어렵지만 평탄한 구간에서도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익숙함을 버리고 과감한 도전을 선택한 결과, 세계 최강자들이 하나둘 그의 전략에 무너졌다.

준결승을 통과한 김상겸은 결승에서 2022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카를과 맞붙었다. 역전과 재역전이 이어지는 명승부 끝에 0.19초 차로 아쉽게 2위에 머물렀지만, 김상겸은 “90점 이상의 라이딩을 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카를은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상의를 벗어던지며 헐크처럼 포효했다. 맨몸으로 눈밭을 구르는 파격 세리머니였다.

이는 오스트리아 알파인 스키의 전설 헤르만 마이어에게 바치는 오마주였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2관왕 마이어의 상징적인 세리머니를 재현한 것. 올해 40세로 통산 5번째 올림픽에 출전한 카를은 “베이징 때는 감정이 벅차 깜빡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며 웃었다.

카를은 이날 40세 115일의 나이로 동계올림픽 개인종목 역대 최고령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기존 기록은 2014년 소치 대회 올레 아이나르 비에른달렌(노르웨이)의 40세 12일이었다.

김상겸도 카를의 세리머니를 보며 “저도 탈의하고 싶었지만, 벤야민만큼 몸이 안 좋아서”라며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밝혔다.

김상겸의 은메달은 단순한 메달이 아니었다. 2014년 소치, 2018년 평창, 2022년 베이징까지 세 번의 올림픽에서 예선 탈락과 조기 탈락을 반복했던 그에게 네 번째 도전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김상겸의 은메달은 1948년 런던 올림픽 김성집의 첫 메달 이후 78년간 쌓아온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의 상징적 이정표가 됐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통산 400개 메달을 달성한 것이다.

한국 설상 종목으로는 2018년 이상호의 은메달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메달이다.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설상 무대에서 37세 베테랑이 완성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김상겸은 “400번째 메달인 건 경기 끝나고 알았는데, 의미 있는 숫자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며 “포효한 건 울 것 같아서 그랬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김상겸은 10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9일 새벽 선수촌에서 퇴촌해 육로로 독일로 이동한 뒤, 뮌헨 공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