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④] 3월의 초상: 다시 시작하라는 압박과 작은 위로들

김연수 기자
2026-03-05 16:58:30
기사 이미지
[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④]  3월의 초상: 다시 시작하라는 압박과 작은 위로들 (김현정, <내숭: 새해다짐(feat.내일부터)>, 130cm x 163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콜라쥬, 2016.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요즘 한국 사회는 ‘자기 관리’를 현대인의 필수 덕목으로 강요한다. 새해가 밝으면 사람들은 헬스장을 등록하고 샐러드 도시락을 주문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만물이 소생하고 개강과 개학이 맞물리는 3월, 우리는 다시 한번 출발선에 서서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두 번째 새해 다짐’을 한다. 하지만 이 다짐의 이면에는 늘 쫓기듯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완벽한 몸매와 건강한 식단이라는 목표는 종종 우리의 본능적인 욕망을 억압하고, 실패했을 때의 무력감만을 남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회가, 실제로는 그 피로감을 해소할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인 ‘먹는 기쁨’마저 절제와 죄책감의 굴레로 밀어 넣는 이 모순이 나는 답답했다.

한국화가로서 이 아이러니를 지극히 현실적이고 해학적인 한 장면으로 옮기고 싶었다. 전통적인 화조도나 산수화가 아닌, 현대인의 일상적인 피난처인 냉장고 앞을 배경으로 삼은 여인. 샛노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곱게 차려입었지만, 그의 주변은 단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 손으로는 커다란 피자 조각을 베어 물고, 다른 한 손은 언제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 준비를 마쳤다. 이 모습은 다이어트 성공기에서 흔히 보는 ‘애프터(After)’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무장해제된 순간에야말로 인간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 드러난다고 느꼈다. 작품 〈내숭 : 새해다짐(feat.내일부터)〉은 그 치열한 이성과 본능의 줄다리기에서 기꺼이 본능에게 자리를 내어준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의 핵심은 공간의 이중성과 친숙한 오브제들이다. 활짝 열린 냉장고 안에는 샐러드와 채소 등 ‘이상(Ideal)’을 대변하는 건강식들이 채워져 있다. 냉장고 문에는 다이어트를 자극하는 전단지가 붙어 있지만, 그 위를 보기 좋게 덮어버린 배달 음식 전단지는 얄궂은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여인의 발치에 널브러진 대형 마트의 피자, 컵라면, 탄산음료, 그리고 품귀 현상까지 빚었던 허니버터칩 세 봉지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이는 유행하는 것은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동시대의 소비 욕망이자, 헛헛한 마음을 달콤하고 짭짤한 자극으로 채우려는 현대인의 거울이다. 식어버린 열정보다 무서운 것은 식어버린 치즈다. 차가운 샐러드 대신 뜨거운 피자를 택한 그의 표정에는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달콤한 자기 위안과 비장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사회가 상상하는 완벽한 다이어트는 흔들림 없는 의지와 금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삶은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매년 1월과 3월, 다이어트라는 똑같은 새해 다짐을 적어 내려가고 또다시 무너지는 굴레. 제목 속 ‘내숭(Coy)’이라는 단어는 이 반복되는 작심삼일의 심리를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게 꼬집는다. 바깥세상에서는 “이제 관리 좀 하려고요”라며 샐러드를 뒤적이지만, 홀로 남은 방 안에서는 다이어트란 내일 뜨는 해와 같아서 언제나 내일로 미뤄두는 그 어긋남. 나는 이 어긋남을 의지박약이라는 낙인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팍팍한 하루 끝에 허락된 그 찰나의 포만감이 내일을 살아갈 작은 위안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내일’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림 속 여인의 밥상이 욕망에 대한 정직한 긍정이라면, 이제 우리는 그 긍정의 에너지를 삶의 다른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 매번 똑같은 다이어트, 똑같은 외국어 공부를 새해 다짐으로 적어내며 스스로를 속이는 ‘내숭’을 떨고 있다면, 새 학기가 시작되는 이 3월에는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을 기꺼이 베어 물 듯, 머릿속에만 맴돌던 거창한 계획 대신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작고 솔직한 행동을 시작해보자. 냉장고 문을 닫고 다시 여는 그 몇 초에, 오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 한 컵을 먼저 마시기, 오늘 할 일을 한 줄만 적기. 이번 봄에는 뻔한 다짐 대신, 단 하나라도 꼭 실천하는, 살아있는 삶을 살아보자. 삶은 내일에서 자라지 않는다. 행동하는 오늘에서만 자란다.

기사 이미지
[한국화가 김현정이 그린 한국의 초상 ④]  3월의 초상: 다시 시작하라는 압박과 작은 위로들 (출처: 김현정 아트센터)

한국화가 김현정은 선화예중·예고와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BS <해요화 해요> ‘댕기언니’로 활동했으며, 서울시 및 희망브릿지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21세기 풍속도 〈내숭시리즈〉로 한국화의 POP을 대중화하며 30만 팔로워와 소통하는 ‘한국화의 아이돌’로 자리매김했고, 국내외 전시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글_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