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장은 우리 음식의 든든한 기반이자 맛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이다. 콩, 소금, 물,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한데 어우러져 단순한 짠맛을 넘어서는 깊고 진한 감칠맛을 완성해 낸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밥상의 어른'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매 끼니 상차림의 중심을 굳건히 지켜왔다. 단 한 방울만으로도 음식의 맛과 결을 단번에 바로잡는 덕분에, 예부터 집집마다 간장을 담그고 보관하는 일은 한 해 살림살이 중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였다. 그 작은 한 방울 속에는 각 집안이 걸어온 고유한 역사와 식구들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씨간장으로 대를 이어온 100년 전통 종가의 장독대부터 거친 바다의 짠 내음을 그대로 품어낸 여수의 어간장, 그리고 땅과 바다의 진귀한 재료들을 오랜 시간 정성껏 숙성해 빚어낸 어육장과 천리장까지 두루 살핀다. 전국 곳곳에서 각기 다른 삶의 방식과 환경 속에서 굳건히 이어져 온 다양한 간장의 세계를 따라가 본다. 이를 통해 우리네 밥상을 가득 채우는 그 깊고 진한 맛의 진짜 뿌리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프리젠터 최수종과 함께 그 근원을 짚어본다.

■ 100년 씨간장 종가, 장 담그는 날 –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는 1,000여 개의 육중한 장독이 너른 마당을 가득 채운 집이 있다. 이곳은 계절마다 바뀌는 따사로운 볕과 시원한 바람을 품으며 한 집안의 깊은 시간을 묵묵히 익혀가는 조정숙(67) 씨 모녀의 삶의 터전이다. 이맘때면 새로운 장을 담그고 잘 익은 장을 가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날들을 보낸다. 종갓집으로 시집온 조정숙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귀한 100년 씨간장을 물려받았고, 매년 새로 담근 햇장에 이 씨간장을 더하는 첨장 방식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특유의 장맛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이제는 든든한 딸 변수정(31) 씨도 엄마 곁을 지키며 그 고되고 지난한 시간의 무게를 함께 견뎌내며 장 담그는 대를 이어가고 있다.
깨끗한 짚불을 피워 항아리를 구석구석 소독하고, 전통 방식 그대로 소금물을 내려 메주를 담그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집안의 큰 농사이자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 두 달 남짓의 기다림 끝에 잘 익은 장을 가르는 날이면, 푹 삭은 메주는 구수한 된장이 되고 맑게 우러난 장물은 신선한 햇장이 된다. 그리고 켜켜이 쌓이는 시간과 함께 간장은 맑은 청장과 깊고 진한 진장으로 그 풍미의 깊이를 한층 더해간다. 이렇게 정성으로 빚어낸 장맛은 짭조름한 된장깻잎나물찜, 영양 가득한 전복소고기진장조림, 그리고 고소한 간장육전으로 새롭게 태어나 종가의 풍성한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 어간장, 바다를 품다 – 전남 여수시 화양면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에 자리한 한적한 호두마을은 멸치잡이가 한창인 계절이 오면 온 동네 골목마다 구수한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한다. 이곳 주민들이 만드는 간장의 주재료는 흔히 아는 콩 메주가 아니라,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은빛 멸치다.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푹 삭힌 멸치젓에서 맑게 걸러낸 젓국물을 은근한 불에 달여 만드는 이 특별한 장이 바로 '어간장'이다. 여수 바다의 생명력을 통째로 진하게 농축해 낸 호두마을만의 자랑스러운 별미장이다.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전통 방식을 고집스레 이어가는 박은후(60) 씨와 거친 파도와 싸우며 멸치 배를 타는 가족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어간장은 단순한 요리 양념이 아닌 바다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세월 그 자체가 되었다.

■ 천리(千里)와도 같은 긴 인생을 달이다 - 전북 완주군 경천면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경천면에는 남들과 달리 간장독을 마당 한가운데가 아닌 서늘한 땅속 깊이 묻어두는 특별한 집이 있다. 비옥한 땅과 푸른 바다, 그리고 맑은 들에서 얻은 온갖 귀한 식재료들을 모두 품어낸 '어육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질 좋은 소고기와 닭, 꿩부터 바다의 숭어, 전복, 멸치, 홍합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을 망라한 다채로운 재료를 구수한 메주와 함께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서 1~2년 동안 묵묵히 숙성하는 어육장은 파평 윤씨 가문에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귀하디귀한 내림장이다. 여기에 '천리를 가도 그 맛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천리장'까지, 이 집 마당의 장독에는 수백 년 세월을 이어온 범상치 않은 깊은 장맛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올해로 76세가 된 윤왕순 씨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지금도 이 귀한 장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유독 손이 많이 가고 고된 장 담그는 날이 돌아오면, 동생들은 하나둘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언니의 손발을 자처하며 든든하게 곁을 지킨다. 힘든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차마 말리지 못하고 지켜만 보았던 지난날의 애틋한 마음과, 이제라도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려는 따뜻한 마음이 이들의 손길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이제 이 집은 동생들에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또 다른 '친정'이 되었다고 한다. 동생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주시던 따뜻한 밥상을 떠올리며, 이제는 맏언니가 담근 깊은 장으로 그 그리운 맛을 차근차근 이어가고 있다. 감칠맛 나는 어육장으로 깊게 맛을 낸 어육장콩비지돼지등뼈탕, 봄 내음 물씬 풍기는 향긋한 달래어육장과 구수한 시래기밥, 그리고 진한 천리장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천리장닭무침까지.
'한국인의 밥상' 748회 방송시간은 4일 저녁 7시 4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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