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많고 탈 많던 ‘마타하리’ 재소환
1876년 ‘마가레타 거트루드 젤르’ 출생, 1889년 만국박람회 에펠탑 공개, 1905년 ‘마타하리’ 개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 ‘마타하리’ 처형. 유럽의 황금기 벨 에포크는 한 여인과 함께 막을 내린다.
비렁뱅이 꼴의 ‘마가레타’는 마침 길을 지나던 ‘안나’에 의해 팜므파탈 무희 ‘마타하리’로 탈바꿈한다.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만석. “관객은?” “지붕까지 꽉 찼지” “기자들은?” “유럽의 모든 신문사들에서 다 왔어” 몇 번이고 묻는 그녀의 물음은 들뜨고 애타기를 반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그녀이기에.
불그스름한 분장실은 ‘마타하리’를 더 야릇하게 비춘다. 오간자 의상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부드럽되 절제된 춤사위를 이어간다. ‘사원의 춤’ 넘버에 허리춤의 체인도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유혹을 부추긴다. 속살이 드러날수록 함성도 들끓는 법. 앙상블과 사방으로 팔을 뻗는 퍼포먼스는 파괴와 창조의 신 ‘칼리’를 연상시킨다.
‘마타하리’의 눈짓과 몸짓에 정계, 재계 고위인사들의 콜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코르티잔의 그녀에게도 과거를 희석할 기회가 찾아온다. 하늘에서 떨어진 조종사 ‘아르망’의 치기 어린 매력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 때 묻지 않은 그와 있으면 지난한 아픔도 잊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도.
한낱 욕심이었을까. 질투에 눈이 먼 ‘라두’ 대령의 폭주가 시작된다. 이날의 집착이 훗날의 후회가 될지 모른 채. 사지로 몰린 ‘아르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노라 애원하는 ‘마타하리’가 괘씸하다. ‘스파이가 되어’ 넘버에 둘은 격정의 탱고로 신경전을 벌인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의 첩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핏빛의 재회 끝에 ‘마타하리’는 ‘아르망’으로부터 군사기밀을 입수한다. 그러나 코드명 ‘H21’ 이중간첩으로 지목되며 양국의 의심과 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법원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 주위는 마녀사냥이 한창이다. ‘라두’는 ‘아르망’을 반역자로 몰아세우지만 ‘마타하리’가 대신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찐사랑과 짝사랑의 치열한 감정선이 압권이다.
떠들썩한 12번 방. ‘안나’가 드디어 드레스를 완성한 것. ‘마타하리’는 ‘아르망’에게 가장 예쁜 모습을 뽐내 본다. 두 사람은 애틋하게 어루만지며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눈물로 얼룩진 면회에 관중들도 코를 훌쩍인다. 12명의 사수 앞에 선 그녀는 담담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탕. 둔탁한 총성에 심장이 동요한다.
# 2024 ‘마타하리’ 완결판(친절.VER)
서사, 무대, 연기 대극장의 3박자를 모두 아우르며 비로소 완벽해진 2024 버전의 ‘마타하리’. 극의 재미는 이해도에 달린 만큼 서사의 친절성이 요구되는 바. 이번 사연은 ‘안나’의 비중이 커지면서 인물 간의 관계성을 촘촘하게 연결, 메인 캐릭터들의 성격을 명료하게 확립하며 몰입력을 배가시킨다.
또 아르 누보 양식의 건축물과 휘황찬란한 벨 에포크 의상은 ‘인형의 집’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삼각관계를 구체화하는 일루미네이션과 히로인을 집중 조명하는 스포트라이트, 전시 상황에서 바쁘게 회전하는 무대 장치와 현장감이 느껴지는 전투 사운드 등 그간의 내공을 연출로 확인할 수 있을 것.
# 옥주현X김성식X노윤, 경력의 연륜과 신입의 패기만이...
옥주현, 김성식, 노윤은 연륜과 패기로 케미를 증명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전쟁 스토리만으로 도파민을 자극하지만, 세 사람의 연기는 파국 엔딩에도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마타하리’로 환귀한 옥주현은 한껏 훌러덩 벌러덩 하며 자신의 안방처럼 무대에 녹아드는가 하면, 카리스마적인 넘버들까지 무난하게 소화하며 관객을 휘어잡는다. 특히 마성의 꿀벅지, 쫀득한 손키스, 앙큼한 벨리댄스 등 ‘옥타하리’만의 미인계는 오리지널 캐스트의 관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김성식은 지고지순한 ‘아르망’으로 완벽 변신한다. 그녀 앞에서는 댕댕이 연하남으로, 비행장 안에서는 에프엠 선배님으로, 철창 뒤에서는 비련의 끝사랑으로 책임을 다한다. 지난 시즌 호흡을 맞춘 옥주현과의 애정신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달달하니 주의 요망.
전쟁의 희생양은 ‘마타하리’만은 아닐 터. 노윤은 명예욕을 짓누르는 소유욕을 병적으로 묘사해 뭇매를 부르다가도, 한편으로는 몽니를 부리는 어른아이로 중첩되며 동정을 베풀고 싶게 만든다. 게다 라이터와 담배만으로 ‘라두’의 권위와 성질을 표현한 디테일은 새삼 놀랍다.
한편 뮤지컬 ‘마타하리’는 2025년 3월 2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이진주 기자 lzz422@bntnews.co.kr